역사

[스크랩] 이인좌의 난, 영조를 살린 것은 신기전

jeansoo 2011. 8. 15. 00:57

1728년 3월 14일 영조를 몰아내기 위한 반란이 일어났다. 그것이 역사에서는 이인좌의 난. 혹은 무신년의 난이라고 부른다.

 

17세기 말 소빙하기로 계속되는 흉년으로 인해 조선은 대기근이 공습했다. 인구 140만 명 이상이 줄어들었고, 인구 15% 이상이 아사자로 발생한 것이다. 장길산 등이 활동하면서 드라마 동이에서 나타난 것처럼 검계 등 비밀결사대 등이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숙종 때 정체불명의 일단 무리들이 남대문과 대간의 집에 벽보를 붙여 "우리들이 모두 죽지 않는 한 끝내 너희들 배에 반드시 칼을 꽂으리."라는 말들이 써 붙였다.

 

그러나 이런 소규모 반란과 규모 비교도 되지 않는 대규모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대감은 선왕의 아들이 아닙니다.” 1728년 이인좌가 한 말이다. 이인좌는 영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대감! 대감의 얼굴과 선왕(숙종)의 모습은 너무 다릅니다. 선왕은 당신처럼 그렇게 수염이 많지 않았어요.”


1728년 3월 27일, 이인좌는 고개를 당당히 들고 영조에게 눈을 부라리며 대들었다. 놀라움과 두려움, 분노 같은 복합적인 감정에 몸을 바르르 떨던 영조는 갑옷을 입고 무장한 상태에서 칼을 들고 곧바로 이인좌의 목을 자기 손으로 베어버렸다.

 

그리고 그 피 묻은 칼을 휘두르며 “이 자의 말을 믿는 자들은 앞으로 나와라!”라고 소리쳤다.

영조는 그 날 몰려든 군중들을 향해 칼을 휘두르며 광기를 내보이고 있었다. 갑자기 광인의 얼굴로 소리치는 임금을 본 백성들은 벌벌 떨며 뒷걸음질 쳤다.

 

안성에 있는 오명항 전적비

 

1728년 3월 15일 발발한 이인좌의 난은 영조라는 임금을 인정하지 않는 반란이었다. 규모도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20만 명 이상이 참가했다. 영조는 반군 두목 이인좌를 잡은 지 이틀 만에 서둘러 죽여 버렸다. 역적의 수괴를 잡은 지 이틀 만에 죽인 것은 극히 이례적이었다.

 

영조는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면서 선의왕후 언문교서가 반군들에게 건네진 것을 알았다.


“왕실의 씨가 바뀌었으니 바로 잡아라!”


그 교서 때문에 반군을 따르는 무리들이 더 많아졌다.   지독한 여인은 1730년 6월 29일, 남편을 죽인 임금은 시동생이 아닌 원수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부릅뜨고 죽었다. 거의 보름 동안 물도 마시지 않고 곡기를 끊은 채 원망과 저주를 퍼부으며 죽었다.

 

영조의 운명, 아니 이인좌의 난의 성공과 실패 판가름은 1728년 3월 23일에 결판났다. 이 날이 바로 그 유명한 안성의 청룡산 전투가 일어난 날이다. 이 전투에서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이 승리함으로써 일단 반란군 사기는 급속하게 꺾였다. 총사령관 오명항은 첩보부대를 운영해 반란군의 본부인 청주성 깊이 들어가, 거짓 정보를 흘리면서 적을 유인했다. 반란군은 안성과 죽산 양 방향으로 나뉘어 한양 진격을 하고 있었다.

 

안성전투에서 초반 관군이 기선제압을 하는데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雨)와 영화로 상영됐던 조선의 신무기 ‘신기전’이란 화포였다.


그 날 갑자기 날씨가 어두워지다 비가 쏟아졌다. 평소 기우제를 열심히 지낸 영조. 토벌군에게는 위력적인 무기 신기전(神機箭)이 있었다. 신기전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로켓포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세종 시절 발명되고 임진왜란 당시에서 평양성 탈환 작전, 한양 수복작전에 동원됐던 그 조선의 위력적인 화포가 1724년 3월 23일 또 작렬했다.


그 날 실록의 기록을 토대로 살펴보면 오명항이 군사를 이끌고 안성에 이르니 날이 어두워졌다. 적들 진지에서 횃불들이 우람했고 포성이 계속 들렸다. 이때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치고 천둥 번개가 쳤다. 갑작스런 날씨 변화였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지척도 분간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런 날씨 변화는 심리적으로 반란군이 위축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영조는 비가 올 것을 대비하고 공격하라는 지시를 오명항에게 내렸다. 반란군은 폭우가 올 것을 전혀 대비하지 않았고 반대로 토벌군은 철저히 폭우 속 전쟁을 예상하고 대비했다. 그리고 곧이어 반란군들이 포진하고 있는 곳으로 수십 대의 신기전에서 불화살이 날아갔다. 순식간에 반란군의 진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들 포대는 물에 흠뻑 젖어 무력화된 부대가 되어 버렸다. 

 

그날 실록은 반란군의 피해는 ‘시체가 산을 이룰 정도였다.’는 말로 토벌군의 대승을 기록했다. 이인좌는 관군을 피해 민가에 숨어 있다가 동네사람들에게 잡혀 오명항에게 넘겨졌다.

 

 이인좌 난에 가담했다 멸문된 가문이 많음

 

1728년 이인좌의 난은 그 반란의 규모에 비해 영조의 조사 과정은 매우 빠르게 끝이 났다. 1728년 3월 15일 시작된 반란은 관군 총사령관 오명항이 4월 19일 남대문으로 들어오면서 사실상 진압이 완료된 것이다. 영조는 오명항이 들어오자 남대문 앞까지 마중을 나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 날 영조는 오명항으로부터 헌괵례(獻馘禮)를 받았다. 장소는 창덕궁 정문 돈화문, 그곳에 많은 사람들이 운집한 가운데 헌괵례를 받은 것이다. 헌괵례는 전장에서 적들의 머리나 귀를 베어 임금에게 바치는 예다. 장대에 반란의 수괴 머리들이 매달려 돈화문 성곽 주위에 깃발처럼 머리카락이 날렸다. 오명항이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 무릎을 꿇고 있었고 영조는 그의 두 손을 마주 잡으며 함께 눈물 흘렸다.

 

“내 경의 공은 죽는 날까지 잊지 않겠소!”

 

이인좌의 난에서 만약 영조가 비와 신기전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그는 임금의 권좌에서 쫓겨났을 것이다. 조선의 반란 규모 가운데 최대규모, 20만 명이 참가했다는 이인좌의 난. 하지만 역사에서 이 반란은 왜곡 또는 축소됐다. 영조의 출생의 뿌리 의심을 두고 전국적으로 반란이 일어난 이 반란. 갑자기 내린 폭우, 신기전 덕분으로 영조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유독 영조는 집권 기간 기우제를 많이 올린 임금이었다.

 

영조를 살린 신기전

 

 

 

참고도서

 

 

출처 : 사랑나무
글쓴이 : 사랑나무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