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스크랩] 국보 180호, 세한도에 숨은 비밀

jeansoo 2013. 8. 4. 23:44

[역사스페셜]

국보 180호, 세한도에 숨은 비밀

 

 

한 칸 초가에 철저히 갇혀버린 천재. 모두가 떠나 버린 천혜 고도의 외로움. 절망의 끝에서 피어오른 조선 선비정신의 절정. 세한도(歲寒圖). 문인화의 걸작, 세한도의 담긴 추사 김정희의 내밀한 속마음은 무엇일까?

 

세한이란 추운 겨울이라는 의미입니다.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彫). 추운 겨울이 돼야 소나무와 잣나무에 시들지 않음을 안다는 그 말로 더 유명한 그림 세한도. 헌데 산수화도 아니요, 인물화도 아닌 이 단순한 그림이 왜 국보로 지정된 걸까요? 또 이 세한도를 왜 문인화에 정수라 표현하는 걸까요. 그동안 세한도는 그 유명세에 비해서 전체를 감상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오늘 역사스페셜에서는 국보 제 180호인 이 세한도의 전체를 공개하고 그 이면에 숨겨졌던 비밀스런 이야기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지난 10월 국립중앙박물관에 회화전시실. 전시회 준비가 한창인 한 켠에서 제작진도 촬영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조명은 문화재 손상을 주지 않기 위해 열이 나지 않는 특수 조명을 준비했다. 이곳에서 열릴 전시회는 중국 사행을 다녀온 화가들 전.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인물들의 작품 전시가 예정돼 있었다. 마침내 제작진이 기다리던 작품이 등장했다.

 

 

한 폭의 두루마기다. 예상과 달리 아주 길었다. 조심스레 펼쳐 나가자 먼저 제품의 제목과 제품의 소장 내력에 대한 설명이 보인다. 작품이 만들어진지 70년 후인 1914년에 포구됐다. 제목에 이어 드디어 기다리던 본 작품이 나타났다. 국보 제180호 세한도. 추사 김정희의 이상과 혼이 담긴 그림. 그리고 그림에 이어 김정희의 필체로 그림에 대한 발문이 붙어 있다. 대단히 정중하고 단정하게 쓰였다. 발문치고는 꽤 긴 그림. 우리가 보아온 세한도는 그림과 발문. 바로 여기까지다. 그런데 세한도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림과 발문에 이어 수만은 글이 이어졌다. 세한도를 감상한 사람들이 쓴 감상기인 제영이 붙어 있었다. 이로써 세한도는 그 전체 길이가 무려 14m. 일반적인 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렇게 세한도 전체의 모습이 처음으로 우리 눈앞에 펼쳐졌다.

 

이원복 / 국립중앙박물관

“세한도는 국보로 지정된 점도 중요하지만 아마 일반분이 추사하면 글씨와 더불어 그림으로 대표적인 작품이기 때문에 많이 기억하실 텐데 문제는 별로 공개한 적이 없잖습니까? 그래서 이번 기회가 좋은 시기라고 생각해 봅니다. 많은 분들이 오셔서 말씀으로만 들었던 세한도를 직접 만나보셨음 하는 바람입니다.”

 

 

소나무 한그루. 잣나무 셋. 그리고 집 한 채. 단순하기 그지없는 그림. 이것이 바로 김정희의 세한도 진본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세한도에는 종이를 이어 붙인 자국이 보인다. 그것도 두 군데나 이어 붙였다. 석장의 종이를 이어 붙여 그린 세한도. 세한도는 소나무를 중심으로 삼등분해 감상할 수 있다. 오른쪽 부분은 훤하게 여백으로 처리했다. 그림은 맨 먼저 오른쪽 윗부분에 시선이 간다. 제목 세한도와 세로로 쓴 글씨, 그리고 붉은 인장을 지나 소나무 가지로 자연스레 시선이 연결된다. 노송이 하나 받고 있는 글씨. 그 자체가 이미 그림의 한 부분이다. 절묘한 구성이다. 글씨와 나뭇가지에 자연스러운 만남, 절제된 여백에 세한도 특유의 쓸쓸함을 담을 수 있게 한다.

 

이우환 화가

“붓에 물감을 닦아내고 갈필로 소나무 몇 그루 윤곽으로 된 집을 간략한 필체로 그려낸 아주 극한에 달한 그런 그림입니다. 그려진 것과 그려지지 않는 것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넘어서 어떤 우주와 통할 수 있는 그런 엄청난 외로움 속에 (그려진)그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극한의 외로움을 주는 거칠고 쓸쓸한 화법, 김정희는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가을이 깊어가던 지난 10월. 엄청난 인파가 한 미술관 앞을 메우고 있었다. 풍속 인물화 대전 전시회장. 조선최고의 화가들이 그린 풍속화와 인물화를 보기 위해 몰려든 인파였다. 신윤복의 미인도를 비롯, 조선의 걸작들이 전시됐다. 이 미술관에는 김정희가 추구했던 그림 세계를 알 수 있는 화첩이 있다. 이 화첩을 평생 간직하며 감상했던 김정희는 친필로 후손들에게 신신당부하고 있다. 왜 김정희는 이 화첩을 그토록 소중히 여겼을까? 김정희는 원나라 때 간결하고 거친 듯 황량한 화법을 지식인이 지향해야 할 최고의 경지로 생각했다.

 

박철상 고문헌전문가 「세한도」의 저자

“추사가 원나라 사람들의 세계를 추구한 것은 따지고 보면 추사의 글씨나 추사의 학문이나 이런 것과 거의 같은 맥락이라고 보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추사의 글씨도 보면 추사가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글씨가 아주 부드럽고 살찐 이런 글씨라기보다는 아주 메마르면서 강직하고 뭔가 금석기가 느껴지는 이런 것들이 드러나는데 그림의 경우에도 원나라 시대에 유행했던 황솔한 느낌, 아주 거친 느낌이 나고 뭔가 황량한 느낌이 나고 그런데서 어떤 선비의 기상 또는 지식인의 어떤 내면세계를 보여줄 수 있는 그런 것이 가장 적합하다. 그래서 그런 방향으로 추구했다고 볼 수가 있죠.”

 

 

그렇다면 추사는 거칠고 메마른 느낌을 어떤 필법으로 구현했을까? 얼마 전 벽해타운이라는 편지화첩에서 그 실마리를 알 수 있는 귀중한 편지 한 통이 발견됐다. 김정희는 편지에서 초의 스님에게 초묵법이라는 기법을 설명하고 있다. 초묵법이란 무엇일까? 송영방 화가는 추사선생 영주적거도라는 김정희의 유배시절 모습을 그린 대표적인 동양화가다. 동양화는 보통 먹색으로만 그림을 표현한다. 세한도도 마찬가지. 짙고 옅은 먹물로만 그려졌다.

 

“같은 먹이죠? 다 똑같은 먹으로 그린 것이다. 같은 먹인데 멈추면 진하게 돼요. 속도?”

 

그런데 보통 그림을 그릴 때 진한 먹과 엷은 먹을 사용해 농담을 표현하는데 세한도는 한 가지 먹으로만 짙고 옅음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초묵법은 먹물은 아주 팥죽처럼 진하게 갈아서 물길을 짜낸 채 붓에 묻혀 오로지 붓의 속도로만 진하고 옅은 농담을 표현한 것. 즉 붓질이 빠르면 옅어지고 느려지면 진해지는 것이 초묵법 원리였다.

 

“먹의 짙고 옅음이 없기 때문에 완급(속도) 조절로 흐린 부분과 진한 부분을 표현합니다.”

 

문제는 필력이다.

 

“그렇게 하려면 필력이 말할 수 없이 좋아야 해요.”

 

순간순간 힘과 속도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필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 초묵법이다. 마른 붓과 진한 먹물만으로 거칠고 메마른 느낌을 담아낸 세한도. 대학자 김정희의 지성과 명필 김정희의 필력이 낳은 걸작. 국보 제180호, 세한도다.

 

추사체라는 독창적인 서체를 완성하고 금석학과 고증학으로 학예의 일치의 경지를 일궈낸 대학자 추사 김정희와 이토록 쓸쓸하고 황량한 세한도를 그린 화가 김정희. 언뜻 잘 연결되지 않는데요. 세상에는 “추사 김정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조선 후기 시대의 격랑 속에 던져진 인물 김정희를 만나 보겠습니다.

 

 

추사 김정희의 국제적인 명성을 잘 말해주는 그림 한 점이 있다. 학자풍의 사람에게 다른 사람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있는 그림이다. 중국의 문인 정조경이 직접 그려 보냈다. 청나라 문인 정조경은 왜 김정희에게 이런 존경을 표했을까?

 

박우홍 / 문복도 소장인

“완당 선생의 학문이라든지 익히 알려져 있는 인품이라든지 이런 것 때문에 흠모한다는 표현을 하고 이런 그림을 보낼 수 있다는 건 지금으로 생각하면 국제적으로 그 분이 얼마나 명성이라든지 익히 그분의 학문이 알려졌는가를 새삼 알 수 있는 그런 그림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당당한 모습의 김정희와 작은 모습으로 인사하는 정조경. 당시 정조경은 김정희보다 한 살이 많았다. 그리고 둘은 만난 적조차 없다. 만난 적도 없는 청나라 문인이 극도로 존경한 김정희. 어떻게 이런 명성을 얻었을까? 추사가 말년을 보냈던 경기도 과천시 추사 연구회. 이곳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있었다. 원본은 사라지고 흑백사진 한 장으로만 남은 그림 한 점. 그림은 잔치 장면을 담고 있다. 그런데 그림 속 글에 김정희의 이름이 나온다. 김정희가 중국을 간 것이다.

 

김영복 연구위원 / 추사연구회

“이것은 추사가 중국에서 돌아올 때 중국에서 사귀었던 사람들이 추사한테 전별연해주는 거고 그때 설명에 있는 것처럼 주학년이 (그림을) 그리고 거기 참석했던 사람 이름 적어 놓은 겁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눈에 띤다. 환송연회 가운데 앉은 김정희. 그의 복장이 무관 복장이다.

 

“그 당시에 (김정희가) 자제군관이라는 직책으로 갔기 때문에 자제군관이라는 것은 정사, 부사, 서정관 3사의 가족 중에서 소위 말하면 비서로 가는 거죠. (그런 자격으로) 갔기 때문에 공식적 자리에선 항상 군복을 입어야 되고 그래도 여기도 지금 공식적 자리기 때문에 지금 우리나라의 전립하고 우리 군복을 입은 거죠. 그러니까 이제 그래서 여기서 우리나라 사람은 딱 한명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게 추사라는 걸 알 수 있죠.”

 

 

김정희는 왜 청나라에 갔으며 왜 청나라 학자들은 김정희와 이별을 아쉬워했을까? 조선외교의 가장 중요한 상대는 늘 중국이었다. 조선은 황제의 생일이나 동지 등에 중국에 정규적으로 사절단을 파견했다. 이를 사행이라고 한다. 사행 기간은 대략 왕복 두 달. 베이징 체류기간 두 달. 총 4개월 정도다. 사행의 주 업무는 외교지만 중국과 세상의 지식을 습득하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했다. 순조 때인 1809년 10월. 김정희의 부친 김로경이 동지부사로 연행길에 올랐다. 이때 김정희는 부친의 자제 군관 자격으로 함께 북경으로 갔다. 그의 나이 24살 때였다.

 

 

중국에 간 김정희의 내심은 청나라 석학들과의 교류였다. 중국 강남지방은 대대로 학문과 예술이 발달했다. 특히 절강성 양조우는 중국문화 예술의 중심지였다. 베이징에서 김정희는 평생 잊지 못할 양조우 출신에 한 인물을 만났다. 바로 운대 완원이었다.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양조우 주택가에 자리 잡은 대저택. 전통적인 중국양식에 완원(1764~1849)생가다. 완원은 양조우의 유력 집안 출신이었다. 생가에 마련된 그의 사당. 후손들뿐만 아니라 지방정부 차원에서 완원을 기리고 있다.

 

완석안 / 완원 5대손

“최근 몇 년간 우리 양조우시 정부는 6천만 위안에 달하는 자금을 투자해 완원의 옛집을 재건하였습니다. 여기가 바로 원원의 신주를 모신 사당입니다. 그리고 강변에 있는 완원의 묘지도 다시 단장했습니다.”

 

 

완원은 청나라 조정에서 중요 직을 지낸 정치가였고 대학자였다. 김정희는 베이징에 올 때 이미 완원을 만날 준비를 하고 왔다.

 

전한운 교수 / 중국 양조우 대학 문학부

“그는 중국에 오기 전에 이미 완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곳에 온 후 완원이 확실히 학문이 있고 뛰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가경 15년(1810)에 완원과 김정희는 깊이 있는 만남을 가졌습니다. 완원은 김정희를 만난 후 젊은 사람이 매우 영리하다고 말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죠.”

 

 

김정희가 평생 존경했던 또 한명의 중요한 인물이 있다. 그 교류의 흔적이 이곳 고궁박물관에 남아 있다. 실사구시. 김정희의 학문적 자세를 높이 평가해 옹방강이라는 청나라 학자가 직접 써 준 편액이다. 청나라 최고의 금석학자이자 당대 최고의 서예가. 그리고 경학의 대가였던 옹방강. 1810년 갓 25살이 된 김정희는 당시 78에 노학자 옹방강을 만났다. 두 사람은 필담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옹방강은 김정희를 학문과 문장이 해동제일, 즉 조선제일이라고 했다.

 

박철상 고문헌전문가

“추사가 아버지를 따라서 중국에 갈 때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 옹방강이었습니다. 그 옹방강과 한번 만 만나면서 이 한 번의 만남을 통해서 추사의 일생이 거의 결정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만남을 준비하기까지 10년이 있었고 만남을 통해서 나머지 일생은 그 만남에서 얻은 것들을 추사 스스로 체득하기 위해서 꾸려가고 또 그런 것들을 이뤄가는 그러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연행기간동안 김정희는 당시 중국의 최고 석학들과 교류하며 그의 학문을 높여갔다. 김정희가 귀국하게 되자, 중국 문인들이 베풀어준 전별연이 열린 곳이 바로 이곳 법원사였다. 두 달여 기간 동안 김정희는 다양한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했고 김정희에 매료된 청나라 문인들이 25살에 김정희를 위해 열어준 잔치였다.

 

 

청나라에서 돌아온 김정희는 과거도 뒤로한 체, 학문연마의 길을 택했다. 김정희는 옹방강의 가르침대로 사실에 기초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실사구시의 자세로 조선의 비와 탁본을 고증하고 연구했다. 그 결과 1815년 북한산의 이름도 없이 서 있던 비를 김정희가 최초로 해독해 내었다. 그 비석이 바로 그 유명한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였다. 조선의 금석학은 추사 김정희에 의해서 탄생하고 완성됐다. 10년 동안 김정희는 끊임없이 옹방강에게 편지를 보내 배움을 요청했고 옹방강은 자신의 지식을 조선의 명민한 젊은이에게 고스란히 전수했다.

 

박철상

“편지를 통해서 옹방강이 죽을 때까지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계속 공부를 해나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추사 입장에서 중국의 큰 학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 이미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였기 때문에 내가 이 학자의 모든 것을 배워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죠. 그래서 과거도 포기하고 십년동안 오로지 옹방강, 또는 옹방강의 제자 또는 청나라에서 만났던 그런 인물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학문과 예술의 지식을 습득하는데 온 노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조선 역사에서 학문과 예술이 하나로 조화를 이룬 학예일치의 경지를 이루었다고 평가 받는 추사 김정희. 그의 집안은 증조부 김한신이 영조의 부마가 되면서 조선 최고의 명문가가 되었다. 김정희 집안은 아버지 김로경 때에 그 절정에 이른다. 이후 김정희는 순조 19년 30중반의 늦은 나이에 문과에 급제 벼슬길에 나섰다. 탁월한 학문, 빼어난 집안 배경 속에 김정희는 승승장구했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의 외척 세력을 밀어내기 위해 순조가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자, 김정희 가문에 더욱 힘이 실렸다.

 

 

부친 김로경은 효명세자의 최측근이었다. 효명세자가 편찬을 주관한 문사저영. 효명세자는 책 제목과 서문을 정칠품의 김정희에게 쓰게 할 정도로 김정희를 총애했다. 그러나 갑작스레 찾아온 효명세자의 죽음. 김정희 집안에도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효명세자 사망, 1830년). 1834년 8살의 헌종이 즉위했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가 다시 시작됐다. 1840년 김정희가 동지부사로 결정된 직후 윤상도라는 인물이 올린 상소를 빌미삼아 대옥사가 벌어진다. 55세의 김정희는 터무니없는 무고를 받아 국문 장에 끌려온다. 혹독한 심문 끝에 김정희는 끝내 제주도 유배형에 처해진다.

 

김명숙 교수 / 동덕여대 국사학과

“윤상도 옥사가 안동김씨에 의해서 조작된 그러한 무고한 사건이었음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추사 김정희를 제주도로 강행해서 유배를 보내야 했을 만큼 안동김씨 입장에선 추사를 비롯한 반 외척세력의 결집을 철저히 막아야 될 만큼 위협으로 느껴졌기 때문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30년 만에 청나라 연행이 예정돼 있던 시기에 유배. 이로써 김정희는 청나라 학자들과의 교류가 불가능하게 돼버렸다.

 

추사 김정희는 당시 조선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생각이 남달랐습니다. 스승과 부모가 달아놓은 추석을 앵무새처럼 외워야 하는 당시의 폐쇄적인 교육방식과 출세를 위해서 과거 시험에만 연연하는 공부법이 훌륭한 인재의 탄생을 가로막는다며 비판했죠. 그래서 인지 김정희는 명문양반가 출신이면서도 서얼출신인 박제가를 스승으로 모셨고 승려인 초의를 친구로 사궜는가 하면 역관이었던 이상적, 오경석, 화원인 전기 이한철과 같은 중인들을 자신의 제자로 두는데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세한도가 그려지게 된 데는 바로 이러한 배경이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절해의 고도였던 제주도. 1840년 김정희는 제주도 대정의 한 민가에 유배당한다. 유배형 중에서 가장 무거운 위리안치(가시울타리를 두른 집안에서만 생활해야 하는 최고의 유배형)에 처해진 것이다. 가시울타리로 둘러싸인 작은 집안만이 김정희에게 허락된 공간의 전부였다. 끊임없이 찾아드는 풍토병에 시달렸고 유배 중 음식과 의복은 각자 알아서 해야 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외롭고 쓸쓸한 유배생활. 그의 나이 예순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절한 유배생활에서 유일한 희망은 친구였던 황산 김유근이었다.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안동김씨 집안의 핵심 인물이었고 순조와 처남 매부지간이었던 김유근. 정치적으로는 대척점에 서 있었지만 김정희와 김유근은 어릴 때부터 절친한 관계였다. 최근 발굴된 김유근의 문집에는 두 사람이 얼마나 각별했는지 증언하고 있다.

 

 

김정희는 이런 김유근이 자신을 구원해주리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믿었던 김유근이 사망하고 만다. 설상가상. 유배 3년(1842년 11월 13일)째 부인 예안 이씨가 운명을 달리했다. 부인의 죽음도 모른 체, 김정희는 부인이 죽은 다음 날, 안부 편지를 썼다. 세한도는 이렇게 극한 상황에서 그려졌다. 그렇다면 세한도를 왜 그렸을까? 세한도에는 이 그림을 받은 인물이 기록돼 있다. 제목 옆에 우선 시상.

 

우선은 누구일까?

 

 

 

우선은 이상적이라는 인물의 호. 우선 이상적은 역관이었다. 역과 합격 이후 12차례나 중국을 다녀온 당대 최고의 역관이었다. 그러나 그는 통역만 하는 단순한 역관이 아니었다. 그의 시는 헌종 임금이 애송했을 정도로 뛰어났고, 중국에서는 김정희만큼이나 유명한 인사였다. 베이징 유리창 거리. 중국에서 이상적의 위상을 알 수 있는 자료를 볼 수 있다. 이상적의 8차 연행이었던 1847년. 베이징 유리창에서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은송당집. 우선 이상적의 시문을 모아 12권의 책으로 간행한 이상적 문집이다.

 

 

청나라 문인들이 이상적의 문집을 중국에서 발간해 준 것이다. 제목과 서문도 청나라 문인들이 짓고 썼다. 김정희의 가르침을 받았던 이상적은 유배지에 발이 묶인 김정희에게 청나라의 최신 학문과 동향을 전해주는 소식통이었다. 세한도에는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그려준 이유가 적혀 있다. 선진문물에 목말라 있던 유배객에게 새 학문을 전해준 이상적. 김정희에게 너무도 고마운 일이었다. 이상적의 이런 행동은 귀향전에도 있었다.

 

 

황청경해라는 이 책은 모두 1400권. 360책의 엄청난 분량이다. 청대 유교 경학의 완결판이었다. 이 엄청난 양의 책도 이상적이 북경에서 가져와 김정희에게 전해준 것이었다.

 

김영복 연구위원

“수레가 한 수레예요. 그래서 그 당시 역관이라는 게 심부름 하는 게 많은데 그건 정말 추사라는 사람이 이상적한테 얼마나 영향을 줬는지 모르지만 그 이상적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 . 이상적이 갖다 주니까 추사는 아무리 제자라 하더라도 얼마나 고맙겠어요. 말로 할 수 없는 고마움이죠.”

 

 

실익에 영합하지 않고 변함없는 이상적. 김정희는 사마천의 말을 인용하여 그 고마움을 표했다. 김정희는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라는 공자의 말로 칭송을 이어 갔다.

 

정후수 교수 / 한성대학교 국문과

“정치세력에서 밀려났다고 하는 추사가 귀양 가 있을 적에 현직 역관의 신분으로서 추사에게 끝끝내 추종하고 뒤를 돌봐 드렸다 하는 것은 본인에게 상당히 신분의 위협을 느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행위가 계속 지속됐다는 건 다른 사람들이 못하는 그런 용감한 행동이고 또 그런 절개는 상당히 칭찬해야 될 것 같단 생각이 듭니다.”

 

 

세한도는 선비는 유불리를 따지지 않는다는 우선 이상적의 의리에 대한 김정희의 마음이었다.

 

스승과 제자의 정이 담겨진 그림, 세한도. 헌데 이 세한도에는 단순히 우정만이 담겨져 있었던 것일까요. 명작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말도 있는데요. 이 세한도에 숨겨진 의미와 세한도가 한중일 삼국을 넘나들면서 어떻게 명작으로 만들어졌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상적의 문학을 연구하는 정후수 교수는 최근 세한도에 관한 귀중한 자료 한 점을 입수했다. ‘해객금존제2도’라는 그림이 붙어 있던 글이다. 모두 18명의 중국인들의 글을 모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김정희가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중국인들은 세한도를 보았다고 했다.

 

“세한도가 중국을 갔단 말입니까?”

“중국에 갔지요. 이상적이 가지고 가서 펼쳐 놓고 구경을 시킨 거죠.”

 

 

정후수 교수

“우선이 세한도를 가지고 북경에 들어가죠. 북경에 가서 세한도를 감상할 기회를 만들어야겠다 해서 여러 사람들을 초청해서 시사회 자리를 만듭니다. 그리고 감상을 하게 되는데 그 감상의 모임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 해객금존제2도 이 자료이고 그러므로 세한도가 확실히 중국에 가서 널리 읽혔다는 게 증명되는 자료이기도 합니다.”

 

김정희가 세한도를 그린 것은 1844년, 세한도를 중국인들이 본 것은 이듬해 봄인 1845년이다. 김정희가 세한도를 그린 1844년은 유배 5년째로 해배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은 막막한 시기였다. 돌파구가 절실했다.

 

박철상

“당시 이미 추사는 청나라와 관계, 청나라 지식인들과 관계 또는 국내의 육지에 있는 지식인들과의 관계에서 이미 고립된 인간이에요. 그런 고립된 상황에서 뭔가를 타개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죠. 그리고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은 상황에서 뭔가 살고 싶은 욕구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게 어찌 보면 바로 이 세한도라는 것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만들고 싶었던 거죠.”

 

 

세한도를 자세히 보면 김정희의 계산을 엿볼 수 있다. 종이를 이어 붙인 자국인 역력하다. 세한도는 종이 3장을 이어 붙여 그렸다. 또한 세한도를 그린 종이의 질이 눈길을 끈다. 발문과 그림 부분을 비교해 보면 종이의 질 차이가 확연하다. 그림 부분은 한지를 뜰 때 생긴 자국까지 남아 있는 거친 종이이고 발문 부분은 윤택 나는 고급지다. 발문은 칸까지 그어 단정하게 글을 썼다. 김정희는 항상 최고급 종이를 사용했다. 유배지에서도 끊임없이 질 좋은 종이를 동생들에게 부탁했다. 그런 김정희가 왜 선물인 세한도를 유독 거친 종이에 그렸을까?

 

박철상

“일부러 조각난 종이를 이어 붙여서 그림을 그렸다고 밖에 볼 수가 없어요. 그렇게 보면 그림을 보는 순간 그 그림을 그린 재료 자체가 이미 상당히 곤궁함 자체를 포현하고 있고 그러한 것들이 전달하는 메시지가 아주 더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림을 누구한테 그려줄거나 어떤 그림을 그릴거냐 또는 어디에다 그릴거냐, 이러한 부분들을 종합해놓고 보면 결국 철저하게 계산해서 그린 그림이고 이런 계산된 것을 자신의 의도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이상적이라고 본 겁니다.”

 

세한도는 1844년 여름에 그려졌다. 김정희는 그해 겨울 이상적이 중국에 간다는 것을 알 고 있었다. 쓸쓸하게 그려진 세한도. 자신의 모습이었다.

 

김명숙 교수

“이상적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으로 세한도를 그렸겠으나 그 이면에는 자신의 현재 불우한 처지에 놓인 것을 젊은 시절부터 교우했던 중국 청나라 친구들에게 현재의 정치적 상황을 뭔가 메시지를 남겨주고 싶은 그런 의도에서 세한도를 이상적에게 그려줬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스승의 의중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이상적은 1844년 그해 동지사절 때 세한도를 가지고 북경으로 갔다. 그리고 모든 공식 업무가 마무리 된 1845년 정월. 자금성 근처 병부시랑 오찬의 집으로 갔다. 이상적을 위한 청나라 문인들의 잔치였다. 이 자리에서 이상적은 세한도를 꺼내 보인다. 참석했던 청나라 문인들은 세한도를 감상하고 그 모습을 또 그림으로 그리기도 했다. 그리고 17명의 쟁쟁한 문인들이 세한도 감상기를 썼다. 김정희의 의도대로 중국의 유력 인사들이 김정희가 처한 상황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김정희는 중국에서 돌아온 이상적이 전해준 청나라 문인들의 글을 보게 됐다.

 

박철상

“추사 입장에서는 너무나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이미 잊혀진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막상 보니까 중국의 굉장히 괜찮은 학자들이 자신을 위로하고 또는 자신의 처지를 동정하는 그런 글들을 남기죠. 그걸 보고 힘을 얻게 되죠. 아 이제 내가 죽은 게 아니구나. 살아야 되겠구나. 뭔가 의지를 불태웁니다. 바로 이러한 점이 이 후 추사의 유배생활에 굉장히 긍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가 있고 실제 추사는 큰 힘을 얻게 됩니다. 그 세한도라는 그림을 통해가지고.”

 

제주도에서 북경까지 건너갔던 세한도. 그러나 그것은 세한도의 파란만장한 여정의 시작에 불과했다. 지난 2006년 2월 도쿄의 후지즈카 아키나오 집에서는 아주 특별한 기증식이 있었다. 100여 년 가까이 집안에 보관 중이던 김정희 관련 자료(2000여점의 추사 관련 자료 기증)를 추사 김정희가 살았던 경기도 과천시에 기증한 것이다. 추사 김정희에 대한 귀중한 자료가 총망라돼 있었다.

 

故 후지즈카 아키나오

“정말 잘되었어요. 한국에 추사자료를 전부 기증하게 되어서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어요. 장래에 내가 죽어도... 참 좋은 추사의 작품이니까 받아주세요.”

 

 

김정희와 후지즈카 집안의 인연은 대를 이은 것이다. 아키나오씨의 부친 후지즈카 지카시 교수는 김정희 연구가였다. 북경에서 다시 돌아온 세한도는 몇 사람의 손을 거쳐 1930년대 후지즈카 지카시 손으로 넘어 갔다. 세한도가 김정희 연구가에겐 넘어간 것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 말기 1944년 후지즈카는 세한도를 가지고 일본으로 귀국해 버렸다. 서예가였던 소전 손재형이 이 사실을 알고 대단히 애석해 한다. 손재형은 일본으로 건너가 후지즈카를 몇 달 간 설득한 끝에 마침내 세한도를 돌려받았다.

 

 

추사 김정희에 의해 탄생한 세한도는 이렇게 기나긴 여정을 겪으면서 국보로 만들어졌다. 세한도의 맨 끝에는 독립운동가인 오세창과 이시영, 그리고 정인보의 발문이 있다. 정인보의 감격어린 발문에서 세한도의 역사적 의미를 알 수 있다.

 

정양모 / 정인보의 아들

“그 당시는 위당이나 그런 분들은 모두 절개를 지키는 것이 목숨보다 중요한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어찌 이 그림 하나 오는 것이 나라를 회복하는 전조가 아니겠어요. 거기에 엄청난 뜻을 두신 겁니다. 그림 하나 오는 것이 국권을 회복하는 전조다. 그런 대단한 뜻을 가진 거죠.”

 

거칠고 쓸쓸한 필법으로 문인화의 진수를 담은 세한도.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 소나무와 잣나무에 변치 않는 모습을 빌어 실익과 영합해 이합집산 하는 천박한 세상을 질타한 세한도. 추운 겨울이 와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

 

이원복 학예실장 / 국립중앙박물관

“모든 예술이 그렇듯 예술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일 수도 있고 영혼일 수도 있고 그런데 이 그림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절박한 문제를 그림의 주제로 택해서 그걸 해결하는 그 문제의 답을 제시한 그림이기 때문에 우리들한테는 그림에 대한 앎과 인식만큼 새로운 효용가치로서 표현이 다가오리란 생각을 합니다.”

 

날씨가 점차 추워지고 있습니다. 세상살이도 추워진 날씨만큼이나 스산해 보입니다. 쥐꼬리만 한 이익 앞에서 옳고 그름이 뒤집어 지고 눈앞에 권세가 진리에 척도가 되어 버린 부박한 세태 속에 고졸한 그림 한 장. 세한도의 울림이 아프게 다가옵니다.

 

‘歲寒然後知松栢之後彫’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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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책을 벗 삼아
글쓴이 : 문화재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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